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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두 번, 탈북 세 번
연변나그네
2013. 2. 1. 13:52삭제댓글수0공감수0
북송 두 번, 탈북 세 번 - 김미연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꽃은 언제 봐도 참 신기하기만 합니다. 향긋한 꽃들이 피어나는 4월의 봄꽃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개나리꽃과 벚꽃입니다. 창문을 열면 아름답게 활짝 핀 봄꽃의 향기가 코를 찌를 듯합니다.
아름답고 향기 그윽한 한 송이 꽃의 향을 맡으면서도, 때로는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식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또 좋은 옷을 입으면서도 천국 같은 이곳 서울생활이 인제는 9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지만 아직도 저는 가슴에 남아 있는 아픈 추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고향은 평양입니다. 평양에서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출발하면 이곳 서울까지 길게 5시간이면 올 거리를 저는 6년이란 긴 세월을 거쳐서야 2003년에 남한에 왔습니다.
6년이란 시간이 어떤 이들에게는 짧은 시간이라 할 수 있으나 저에게는 너무도 길고 험한 세월 이었습니다. 6년이란 세월 사랑하는 우리가족이 이산가족이 아닌 이산가족이 되어 어린나이에 상처만을 안고 남한으로 오는 몇 시간 안 되는 비행기에서 기뻐서 눈물 흘리기도 했지만 북한에서의 받은 세뇌 교육 때문에 조금은 두렵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친척 하나 없는 낯 선 이곳 남한에 와서 열심히 잘 적응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저는 이곳 한국에 와서 부자가 됐습니다. 처음에는 딸 두 명, 아들 한명 저를 포함한 우리 식구4명이 왔지만 인제는 두 사위도 생겼고 두 손자도 생겼고 이제 9월이면 또 한명의 손자가 생깁니다.
북한에서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고 영화나 화보의 그림속에서 눈요기로나 볼 수 있었던 행복한 새 삶을 살면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국민들에게 항상 감사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북한의 계급교양자료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지난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어찌 보면 제 생활에 딱 맞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의 행복한 새 삶에서 어떻게 지난 과거, 능력 없는 부모가 된 탓에 금쪽같은 내 아들에게 풀독을 먹여 다 죽게 했고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을 수 없게 가슴 아픈 상처를 줬고 북한에 강제 북송되어 짐승보다도 못한 수모와 받은 멸시에 대해 어떻게 잊을 수 있습니까.
1997년 큰딸을 찾아 16살의 어린 작은 딸에게 의지해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그야 말로 두만강은 우리 탈북자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피눈물이 흐르는 원한이 사무친 피눈물의 강입니다.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넘다가 힘이 없어 세찬 물살에 떠내려 죽은 이들도 있고 두만강을 넘다가 북한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은 이도 있고 두만강을 넘다가 빠른 물살에 떠내러 가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살아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 역시 두만강을 어린 딸과 함께 빠른 물살에 밀려가면서도 우리 모녀를 살려 달라고 하늘 땅 할아버지를 애타게 불렀고 겨우 겨우 죽을 고비를 넘기며 두만강을 건너 왔지만 우리를 기다린 것은 인신매매꾼들이었습니다.
살을 베이는 듯한 차디찬 물속에서 나온 우리 모녀는 금방 가을한 논밭에 들어섰습니다. 뾰족뾰족한 벼 뿌리에 발이 찔러 발바닥에서는 선지피가 흘렀고 온 몸이 얼어 걷지 못하는 어린 딸의 귀뺨을 때려가며 불이 켜져 있는 어느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집 주인이 바로 인신매매꾼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모녀는 그들을 통해 결국에는 팔려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1998년 당시 북한에서는 탈북여성들을 강제 송환해 함흥 오로군에 수용소를 만들어 가두었고 공개 총살을 진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두만강을 넘는 북한 여성들의 수가 적어지자 중국에는 인신매매꾼 보다도 더 한층 악랄한 납치꾼들이 생겨났습니다. 납치꾼들은 중국에 이미 팔려 와서 살고 있는 탈북여성들을 사람들이 곤히 잠자는 야밤에 납치 해다가 다시 길림이나 산둥성, 내몽고 등 먼 곳에 비싼 값으로 팔아먹는 놈들이었습니다.
1999년 7월에 저는 작은딸과 함께 하루 종일 밭에 나가 밭일을 하고 힘든 몸으로 저녁에 한국드라마를 시청하던 중 불의에 침입해 들어온 납치꾼들에게 납치를 당하게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며 다시는 팔려가지 않겠다고 발악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란을 들은 옆집에서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결국 우리는 경찰에 잡혀갔다가 화룡에 있는 국경변방대로 끌려갔습니다.
그 후 도주한 납치공범들을 잡기 위해 한 달이라는 기간을 딸과 함께 화룡 변방대에 있었습니다.
하루는 쪽잠에 들었다가 아주 작은 울음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일어나 보니 저보다 나이가 3살 많고 고향이 무산인 언니가 잡혀왔습니다. 그 언니는 딸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중국 한족 집에 팔려갔었는데 딸과 함께 있으면 둘 다 잡힐 가봐 딸은 다른 마을에 보냈었다고 합니다.
그 언니는 나이 많은 한족과 함께 하루 종일 두부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농사 삯일도 하면 살다가 그만 공안에 잡혔다고 합니다. 변방대에서는 딸이 살고 있는 곳을 대라고 매일 밤마다 불러내다가 고무 몽둥이로 때립니다. 저에게 옷을 벗어 맞은 곳을 보여 주었는데 커다란 피멍이 들어있었습니다.
고무 몽둥이로 맞은 온 몸에는 살색이라고는 얼굴 부위만 내놓고는 잔등과 엉덩이, 그리고 어깨며 온 몸이 말할 수 없이 석탄 색깔보다도 더 찐하게 멍이 들어있었습니다. 뭐라 할 말문이 막히고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변방 대에 한 달 동안 수감되어 있는 기간 10대부터 70대에 이르는 수많은 탈북여성들과 함께하며 저와 그들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습니다.
화룡 변방대 구류장에 수감되는 탈북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북한으로 강제 북송하는데 한 번에 때로는 10명도 넘었습니다.
청진이 고향인 한 남자는 한 가정의 가장이었는데 두 다리 없는 장애를 가진 아내를 등에 없고 1살 된 막내 딸애는 앞에 업고 영양실조에 걸려 똥물을 질질 싸는 3살짜리와 5살짜리 아들은 양손을 잡고 두만강을 건너 화룡의 높은 숲속에 숨어서 살았는데 변방대 수색에서 발각되어 붙잡혀 왔습니다.
그 가족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어 가는 날 우리는 다함께 울었습니다. 5살짜리 아들이 그래도 집안의 맏이라고 7월의 무더운 여름인데도 겨울 솜옷과 내의를 입고 또 입고 그 작그마한 몸 조차 가늠 할 수 없게 있는 옷을 모두 껴입고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땀 흘리지 말고 그 겨울옷을 벗으라고 말했더니 꼬맹이는 옷을 버리지 않고 모두 입고 가야 북한에서 그 옷을 팔아서 빵이라도 사먹으면 굶어 죽지 않는다고 말을 해서 우리는 가슴 아픈 웃음을 웃었습니다.
그때 변방구류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나라 잘못 만난 불쌍한 국민의 설움과 돈 없고 가난한 설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똑똑히 체험했고 두 눈을 뜨고도 세상을 볼 수 없고 두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장애인이 돼 있는 북한 주민들의 험악한 인권 상황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1999년 8월 10일 드디어 두 손에 수갑을 채운 채 북송되었고 북한 함경북도 무산군 보위부로 끌려갔습니다. 보위부에서는 우선 온 몸을 발가벗기고는 두 팔을 앞으로 펴 들게 하고는 앉았다 일어섰다 반복 50번 소위 ‘뽐프 훈련’을 시키고는 엎드리게 하고 매 사람의 항문까지 검열했습니다. 어린 딸 앞이라 저는 옷을 벗지 않겠다고 했으나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옷 혼솔과 신발창과 발바닥 머리카락을 샅샅이 이 잡듯 검열 했습니다. 아기가 찬 기저귀를 펼쳐 보기도 하고 여성들의 생리대까지 모두 벗겨 검열했습니다.
후에 알게 됐지만 탈북자들이 강제 송환 되어 북한으로 가면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돈을 먹거나 항문과 여자들인 경우에는 자궁에 돈을 감추고 나가기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중에는 임신 6개월 된 임산부도 있었고 이제 태어 난지 겨우 2개월 된 아기와 아기를 출산한지 100일도 안된 아기 엄마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고문을 받는 동안 세상물정 모르는 아기는 엄마 배속에서의 웃던 웃음 그대로 쌕쌕 곤히 자고 있었습니다. 인정사정없는 보위부 지도원 놈은 중국놈의 씨를 받아 가지고 왔다면서 아기의 얼굴을 두꺼운 책으로 사정없이 내리 쳤습니다. 금방 아기의 얼굴은 새까맣게 죽어 한동안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임산부에게도 한족의 씨를 받아 왔다고 그의 배를 발로 걷어찼습니다.
이런 고문을 마치고는 첫 심문이 남조선에 가려고 도강 했는가?, 중국에서 남조선 사람을 만난 적 있는가?, 중국에서 교회 학습을 받았는지를 여러 번 반복해 조사하고 또 조사 했습니다.
조사를 마치고는 군 안전부로 넘겼습니다. 군 안전부에서도 이와 똑같은 조사를 받고는 다시 군 노동단련대로 갔습니다.
단련대에 도착하면 대열훈련을 사람이 쓰러지도록 시킵니다.
어느날 제가 대열 훈련을 받고 있는 동안 담담 안전원은 18살 난 저의 딸을 독방으로 불러 놓고 나이와 정확한 집주소를 대라는 트집으로 무작정 나무 각자로 한 시간 동안이나 때렸습니다. 얼굴이 퉁퉁 붓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온 딸을 보는 순간 저는 온몸에 분노의 전율이 흘렀습니다.
저는 분노를 참지 못한 채 단 숨에 담당 안전원을 찾아가 나는 “주재원 동지도 부모가 있을텐데 자식은 부모를 따라 움직이게 돼 있고 당연히 엄마인 내가 있는데 왜 어린 딸을 저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라며 항의했습니다.
이성을 잃고 덤비는 저한테 주재원은 재수 없다며 제 얼굴에 침을 뱉고는 무시하며 나가버렸습니다. 다음 날부터 저와 딸은 낮에는 강제 노동을 해야 하고 밤에는 작은 방에서 50명이 함께 자야 했습니다. 이가 너무 많아 쭈그리고 쪽잠을 자곤 했습니다. 쪽잠이 아니라 앉아서 졸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일 만에 딸은 산에 나무 하러 갔고 저는 배추 영양 단지를 심으러 갔었습니다.
그때 저는 때마침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탈출을 시도했고 성공하였습니다.
제가 살아야 이산가족이 아닌 이산가족이 되어 중국과 북한 두 나라 사이에 흩어져 있는 내 가족들을 찾을 수 있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하며 죽을 각오를 하며 딸을 남겨둔 채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퉁퉁 부운 다리를 질질 끌며 두만강 강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8월의 장마철이라 깊어진 강물 깊이를 미처 계산 못한 채 뛰어 들다보니 그만 키가 넘는 물살에 떠내려가며 정신을 잃었습니다.
한참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옆에는 나이 많은 어르신이 수심이 찬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제가 여기에 누워 있느냐고 물으니 어르신은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옆집 청년이 건져주었다고 합니다.
8월이면 중국에는 한창 논에 시약을 뿌리는 철입니다. 그 옆집 청년은 논에서 시약을 뿌리고 있었는데 분명 사람이 두만강 물에 뛰어 들어 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물속에서 올라오지 않자 무심결에 시약 통을 벗어 던지고 보았더니 물살에 정신없이 떠내려가는 저를 발견하게 됐고 생각할 사이 없이 뛰어들어 구해줬다고 합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이 고마웠고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얼굴도 모르는 중국 조선족 청년에 의해 새 생명을 다시 찾게 됐고 탈북에 성공했습니다.
단련대에 있던 딸애는 그해 11월에 출소했고 다시 죽을 각오로 두만강을 넘어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렇게 다시 만나 다시는 헤어지지말자며 간신히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 이듬해인 2000년에 또다시 공안에 체포되어 강제 북송을 해야만 했습니다.
새벽 3시쯤 한참 피곤에 몰려 자고 있는데 난데없는 개 울음소리에 놀라 자고 있는 딸애를 깨워 뒤 창문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집 주변을 포위한 납치꾼들에게 붙잡혀 화룡까지 끌려가게 됐고 납치꾼들은 우리를 길림에 있는 사람들에게 팔아넘기고는 다시 길목을 지키다가 우리 모녀를 다시 납치해 두 번 팔아먹으려 했습니다. 그때 거래를 하던 두 패거리가 싸우는 사이 길 가던 행인의 신고에 의해 저희는 공안에 잡히게 됐고 변방대로 넘어갔습니다.
그때 납치꾼들이 야밤에 달려들어 소리치면 죽인다며 제 가슴에 칼을 댔었는데 아직도 그 칼자국 흔적이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참불행하게도 두 번이나 북송당한 우리는 또다시 무산군 보위부에 끌려갔고 예전 그대로 강제로 옷을 벗게 하고는 꼭 같은 뽐프 훈련과 항문 검사를 했습니다.
한창 심문을 받느라 무릎을 끌고 땅바닥에 앉아 있는 저에게 보위부 지도원은 뜬금없이 “야 이 간나! 저 의자가 무슨 의자인지 알아?”하며 물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저는 순진하게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보위부 지도원은 제 남동생이 그 의자에 앉아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군에서 갓 제대 되어 온 남동생은 이 누나를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가 보위부 스파이한테 걸려 북송됐고 어느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당시 우리한테는 한국 상표가 붙은 핸드백이 있었습니다. 그 핸드백으로 인해 8일간이나 보위부 구류장에서 심사와 고문을 더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전 북송됐을 때 경험이 있다 보니 돈을 입으로 삼켰었습니다. 일주일간 돈을 뺏기게 될까 두려워 보위부에서 주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심한 변비로 배 아픔을 호소하자 보위부간수는 설사약 세 번 먹을 양을 한 번에 먹게 했습니다.
중국돈 300위안을 먹었었는데 100위안은 변과 함께 흘러나갔고 200위안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한 친구가 지도원에게 신고 했습니다.
지도원은 “야 이 간나 개도 안 먹는 돈을 먹었어? 남조선 핸드백은 어디서 났어?” 하며 고함을 지르면서 주먹으로 제 얼굴을 때렸는데 그만 제 앞이 두 대 부러졌습니다.
아침이면 기상 동작과 함께 줄을 서서 화장실을 보고는 한 사람씩 주머니 검사를 받곤 합니다.
이런 검사와 조사를 받고 다시 안전부에 넘어 갔었고 군 안전부에서 하루 밤 동안 똑같은 검사와 조사를 받고는 단련대로 이송해 갔습니다.
단련대에서 7일 만에 다시 청진 집결소로 이송됐습니다.
청진 집결소에서 저는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겨우 3평이나 될까말까 하는 작은 방에 20명씩 있게 했고 낮에는 고역 같은 일을 해야 했고 밤에는 빈대와 이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그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저녁에 해가 지면 감옥 안은 캄캄해지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빈대 새끼들이 몸에 붙어 발가락 짬과 배꼽 안과 손가락 짬에서 피를 빨아 먹었고 가려워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에 기상 소리와 함께 옷을 벗어 털면 보리알 같은 이와 빈대들이 후득 후득 팥알 떨어지듯 떨어집니다.
감옥 안에 작은 창문이 있는데 매일 밤 저는 딸과 함께 그 창문에 박쥐처럼 매달려 자곤 했습니다. 어른 손바닥보다도 작은 창문틀에 오른쪽에는 내가 매달려 자고 왼쪽에는 딸이 매달려 자곤 했는데 빈대와 모기에게 물리는 것보다 모기한테 물리는 게 조금은 낳은 것 같았습니다. 떨어질까 창문 쇠살창에 팔을 끼고 그야말로 박쥐 같았습니다.
낮에 안전부 부업 밭에 나가 비료도 주고 영양단지를 빚기도 하고 가을배추도 심었는데 저는 옆에 있는 오이 밭에 뛰어 들어 날쌘 동작으로 오이를 따서는 배 속에 감추어 저녁에 감옥안에 돌아와 비닐봉지에 손으로 꺾어 넣어 창문에 매달아 놓으면 여름이라 김치처럼 새콤하게 익혀졌습니다.
여름이라 생활 형편이 매우 열악한 탓에 피부병과 대장염이 많이 발생합니다. 시큼한 오이김치를 식초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허약을 방지하기 위해 채 여물지 않은 강냉이를 딸에게 강제로 먹이기도 했습니다.
아편을 가을한 밭에서는 아편 씨를 주워 먹었고 풀 뽑기 작업을 하게 되면 풀을 뜯어다가 봉지에 넣어 해 볕에 삭혀 먹기도 하고 호박 줄을 걷는 날이면 생호박을 먹기도 하고 그야말로 손에 닥치는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먹어야 생존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단련대나 집결소에서 준다는 밥은 전쟁준비로 2호 창고에 저장했다가 썩은 밀가루에 돼지 호박을 썰어 넣고 끓인 죽이었습니다. 밀가루 썩은 악취냄새에 그야말로 아무리 배가 고파도 입에 넣으면 토하고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집결소에서 생존을 위해 발악하며 하루하루를 겨우 이어가다가 평양으로 이송되어 가던 도중 청진역에서 딸과 함께 탈출을 시도 했고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비록 탈출에 성공은 했지만 생소한 청진역이라 갈 곳이 없었습니다. 캄캄한 밤에 뛰고 또 뛰어 달렸지만 결국에는 집결소 정문 앞이었습니다.
집결소 뒤쪽 아파트 남의 집 복도에서 쭈그리고 앉아 아침 통근 열차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통근 열차가 서기 바쁘게 저는 딸의 손목을 잡고 뛰다가 그만 돌에 걸쳐 넘어졌습니다.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아팠지만 언제 살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집결소 주변이라 아침 출근 하는 안전원들의 눈과 아침 일찍 일을 하러 나오는 집결소 수감자들의 눈에 뜨이는 것이 두려워서였습니다.
통근 열차 마감역인 수성역에서 내린 저는 딸과 함께 수성역에서부터 함경북도 무산까지 도보로 걸었습니다. 산을 타기도 하고 작은 오솔길을 걷기도 하고 정말 초행길이라 힘들고 무서웠지만 살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무슨 운명인지 남들은 단 한번이지만 저는 3번이나 두만강을 건느게 됐습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세번째 탈북에 성공한 저희 모녀는 중국땅에서 집결소 생활 못지 않은 수많은 어려움과 위협을 받다가 또한번 탈북을 하는 것과 같은 모험을 하며 간신히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당시 북한 당국은 강제 송환해 가는 탈북자 한 사람당 대가로 러시아에서 벌목해 들여오는 원목 2입방미터씩 중국공안에 주었습니다. 나중에 원목이 모자라자 땔감을 주었는데 워낙 땔감이 흔한 중국에서는 이를 거부했다고 했습니다. 하여 2000년에는 한 사람당 100달러씩 중국공안에 돈을 주었고 중국에서는 달러를 받아가며 탈북자들을 강제 북송했고 북한은 돈을 주어가면서까지 탈북자들을 강제 송환 해 무고한 자기 인민들을 정치범수용소와 감옥으로 보내고 공개 총살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꿈속에서도 악몽을 꾸고 있습니다. 불이 번쩍이는 철창살에 남동생이 매달려 타들어 가는 모습, 그리고 제가 아이들을 찾아 등에 업고 두만강과 북중 국경선을 넘지 못해 애타하는 모습들이 자주 꿈속에 나타납니다. 그러한 악몽을 꾸다가 깨여보면 온몸은 식을 땀에 흠뻑 젖어 있습니다.
중국에서의 탈북자 강제 북송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 해 왔으며 북한 당국은 2300만 주민들을 울타리 없는 감옥에 가두어 인권과 자유를 박탈하고 인민들은 추위에 얼어 죽고 굶어 죽어도 아랑곳 않고 체제유지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제가 남한에서 살고 있는 지금도 북한은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 금강산 관광객 사살사건 등을 도발하며 시시각각 무고한 우리 국민들의 생명과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김정일이 죽으면 조금이라도 변화가 되어 북한주민들의 생활이 나아질 수 있지않을까 기대했건만, 또 김정일이 죽으면 고향에 한 번 가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었건만 곧바로 3대세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백성들의 안위에는 관심 없이 오직 체제유지에만 미쳐 폭정을 이어가고 있는 북한체제가 남북한 국민들의 심판을 받을 날은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2번이나 북송됐고 3번이나 목숨을 걸며 두만강을 건너야 했던 나와 같은 탈북자들의 생존의 노정이 없어질 그날도 멀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2012년 5월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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