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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용연 신부

원로사목자가 된 신부의 감사미사에서 


 
나는 우리 학생들 40명을 이끌고 만주벌판 연변을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매년 9월에 하순이면 연례행사로 중국 동북삼성을 방문을 했었다. 백두산 등정, 선진지 견학, 김좌진 승전비, 훈춘지역, 안중근 순례지, 하얼빈 거사 장소, 연해주의 발해지역, 731부대를 찾아 애국심을 길렀다.  
 
이 방문지역 중심에 언제나 ‘북한돕기 감자 보내기 봉사활동’이 있었다. 대전교구 황용연 바오로예례미아 신부가 주도하는 프로젝트에 우리의 학생들이 인성교과에 참여하고 있었다. 방종하던 소극적 학생들이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역사의식을 배웠고 우리가 머문 곳은 호텔이 아닌 초대소에서 이런 곳도 있다며 쥐와 함께 잠을 청하며 가난도 체험했었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이 적극적 인성으로 미래를 꿈꾸며 훌쩍 성장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명박 정부시절은 공백기로 접어들었다. 우리 학생들과 그곳에서의 연례행사도 정지되고 있었다. 아쉬운 ‘해외 세상보기체험’ 장소는 중국 연변에서  ‘네팔’로 바뀌고 있었다. 히말라야 트레킹 등정인 것이다. 고통과 직면하며 자발성과 자기 주도성의 삶의 동력을 창출했고 학생들은 멋지게 서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학업성취도를 향상되기 시작했고 규모가 웅장한 인성으로 학생들은 발돋움 되는 훌륭한 계기가 되었다. ‘좋은 학교’ 명문은 이렇게 커가고 있었다.  
 
어제 대전가톨릭대학교에 위치한 정하상 바오로 교육회관에서는 황용연 신부의 원로사목자가 되는 정년퇴임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다.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신부이기에 찾아 미사를 함께 봉헌했다. 은혜로운 감사미사였다. 제도교회에 있으면서 언제나 교회 밖으로 행군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되어 준 사제를 보고 있었다. 
 
초등 졸업장이 전부인 그가 검정고시로 중 고를 마친 후 신학교에 늦깎이 40세로 입학, 독일로 유학 사회복지학을 전공 학위취득 후 대전교구에서 사회복지국장으로, 사회복지학을  전공, 신학교 교수가 되어 후학을 양성했다, 주교회의 사회복지 위원회 총무로 일하며 북한돕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북한을 수십차례 방문하고 동포애와 인류애를 보여주며 살았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빨갱이’란 말도 수없이 들었다. 
 
성소자를 계발, 40여명의 성직 수도자를 배출했으며 정순택 주교와 고 이태석 신부의 추천신부이기도 하다. 신앙의 핵심은 목적을 향한 걷기라고 말씀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따라 가난한 아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세상 밖으로 복음의 삶 걷기를 계속하고 살았으니 참으로 숭고하다. 나는 신부를 존경하는 이유이다. 한 예로 일년이 멀다하고 이임했던 신부들과는 달리 가난 속에서 라면으로 배를 채우며 그곳 신자들과 7년을 살았다는 후일담이 내 마음을 후벼 놓는다. 그래서 골병들었구나.  
 
원로 사목자이지만 오늘도 북한 하늘길 열려 북한 선교 1호신부가 되길 꿈꾸며 기도하고 있다. 동창신부들이 이임미사에 자리를 함께 한 것만 보아도, 아들 딸 신부 수녀가 수십명 미사에 참석한 것만 보아도 신부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이 증인이라고 여겨진다. “성소가 없다고요? 관심을 가지면 많이 생겨납니다” 독일 유학시절 그 마을에 사제들을 보고 성소자가 많이 탄생한 예를 들고 있었다. 
 
점심 밥이 왜 그리 맛있는지, 살며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 위암투병, 후두 등 3번에 걸친 수술, 이제는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하느님께서 도구로 또 이어서 쓰실 모양이다. 신부는 기도하며 멈춘 일 다시 눈뜨고 꿈꾸며 내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나도 신부님 위해 기도한다. 
 
2021.06.01
윤병훈 베드로 신부